관리 메뉴

알고리즘

한국사의 이해 기말고사 이석린교수님 본문

study/한국사

한국사의 이해 기말고사 이석린교수님

Schizo! 2009. 7. 14. 16:04














서양 고대의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이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로서, 정치적인 행위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홉스는 “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 이라 말하며 자연상태의 인간은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사회계약에 의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치란 것이 존재했다. 인류가 발전하면서 함께 정치의 형태는 세분화되고 발전되어왔다. 인간의 역사와 정치와의 이러한 상관관계는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서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우리 역사상의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매우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가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인식은 오늘날 거의 일반적인 것이 되어 있다시피 하다. 또한 조선시대의 사화와 당쟁 같은 것에 근거하여 우리는 당파성(黨派性)이 강한 민족으로 인식을 갖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말아야할 악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흔히 접할 수가 있다. 물론 망국의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반성적인 의미가 있을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 파쟁적인 민족성을 부각시켜 우리 민족의 정치적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는 가져온다면, 분명 재검토 되어야한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적인 역사의식의 생성에는 우리 민족을 식민통치했던 일본의 정책적인 면이 강하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서 학자들을 조선사연구에 투입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처음부터 분명한 목표가 설정되어 있었기에 한국의 자율적인 발전성을 부정하고 타율성, 분열성, 당파성, 사대주의론 등을 강조하여 그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며 영속화 하려 했다. 이러한 결론을 위하여 편벽한 사료를 선택하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일삼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은 그대로 놓아두면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어있으니 이웃나라로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는 일이어서 일제가 개입하여 도와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식민지 경영은 한국을 회생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라는 것이다. 조선조의 사화와 당쟁은 바로 대내적 파생성의 본보기로 들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등장한 당파성론은 일본사람에게뿐 아니라 한국사람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어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민족개조론을 부르짖는 사람까지도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조선시대 당쟁, 즉 붕당정치의 시작과 그 이행과정, 그리고 그 정치체계가 지니는 특징과 의의에 대해 재조명함으로써 일제 식민사관을 통해 인식되어온 당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지고자 한다.



Ⅱ. 본론


1. 붕당과 붕당정치의 의미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당쟁이란 용어를 거침없이 쓰고 있지만, 그것은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한말, 일제하에서 조선왕조의 정치와 역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입장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져 쓰이기 시작한 용어이다. 조선왕조 당대에는 당쟁이 아니라 붕당이란 말이 주로 쓰였는데, 주로 일인학자들이 그 파쟁성을 부각시켜 ‘붕당간의 싸움’이란 뜻으로 당쟁이란 용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붕당의 본래의미는 무엇인가?

  붕당은 동류인끼리 뭉쳐 당파를 만들어 서로 자기 편이 아닌 ‘黨’을 배척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붕당의 뜻이 애초부터 좋은 의미로만 쓰여진 것은 아니었다. 군주가 절대권을 가진 중앙집권적 전제국가에서는 신료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 할 뿐이지 자기들끼리 붕당을 지어 다투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붕당을 짓는 자는 극형을 면치 못하였다. 중국에서 전국시대 이전에는 붕당을 막아야 한다는 정도였으나 통일전제국가가 성립된 한대 이후에는 붕당을 죄악시하여 중벌을 받게 되었다. 한대의 당고(黨錮)의 화(禍)는 바로 이러한 관념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러 양자강 이남의 경제개발에 힘입어 사대부들이 새로이 정권담당자로 등장하면서 붕당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게 되었다. 집단, 무리로서의 붕당은 정치에서 부정될수 없는 것이란 전제아래, 구양수의 ‘붕당론’ 및 주자의 ‘인군위당(引君爲黨):임금을 끌어 당이 되게한다’ 등과 같은 새로운 해석이 제시된다. 구양수는 붕당에는 군자들의 진붕(眞朋)과 소인들의 위붕(僞朋)이 있어서 군자당은 부양하고 소인당은 타도해야 하며 군주도 군자당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층이 정치주체가 되자 주희의 이론이 대두 하게 되었다. 이때의 붕당은 다 같은 사대부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두 군자당으로 간주하되 군자당에도 군자와 소인이 섞여 있으니 이 중 군자들만 뽑아 쓰면 된다는 것이다. 전제왕권하에서는 원칙적으로 붕당은 용인되지 않는 것이었으나 이때에 와서 사대부들의 정치적인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붕당의 존재를 공인하게 된 것이다. 이 구양수의 군자소인론은 결국 사림의 붕당성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붕당논리는 현종때까지 계속되었으나 숙종대에 환국이 거듭되면서 다시 군자소인론이 풍미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 있어서 상당기간 동안 붕당이 공인되고 있었던 것은 당시에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사림정치가 전형적으로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후기 붕당정치의 특성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붕당정치는 사림정치의 하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정치체제를 놓고 볼 때 사림정치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정치형태였고 붕당정치는 이것에서 파생한 하나의 정치형태였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붕당정치란 붕당이 나누어져서 행하는 정치라는 뜻이다. 또한 붕당정치는 조선후기의 문신정치・사림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으로서의 정치형태를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다. 붕당정치는 성리학의 이념 아래 붕당간의 정치적 갈등 ‧ 대립을 해결하는 구체적 장치로서의 정치체제, 상대세력과의 공존을 특색으로 하며 학파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각 붕당 사이의 공론에 입각한 상호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정치체제라고 한다. 즉 정치형태, 정치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붕당정치는 사림의 공론에 입각하여 몇 개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치체제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붕당정치가 수행되는 과정이나 결과에따라 발생한 여러 사화나 환국을 통해 드러나는 붕당간의 알력, 투쟁, 견재, 배척등을 포괄하는 용어가 필요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는 당쟁이란 용어를 사용할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형태, 정치체제에 중점을 두고 볼 때는 붕당정치라는 개념을, 과정・결과를 통칭할 때는 당쟁이란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학자들은 식민통치를 합리화할 목적으로 과정에만 중점을 두고 그 파행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였다. 1907년에 시데하라 다다시에 의해 저술된 ‘한국정쟁지’는 바로 당쟁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한국민족의 당파성 이론을 주장했다. 조선시대 정파는 “주의(主義)를 가지고 상립(相立)하는 공당(公黨)이 아닌, 이해를 가지고 상호배제하는 사당(私黨)” 이라는 규정아래 그 대립상을 당쟁이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사건의 정연한 목차구성이 없이 ‘....송시열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가’ 와 같은식의 분파성대립의 감정적인 면모등을 강조하려 하였다. 당파성이론은 이런 형태로 만들어져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지극히 편엽한 역사적 사료들을 단편적으로 엮어 그러한 당파성이론을 정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역사에서 당쟁이 물론 주요한 부분이기는 하나 그것 하나로 역사를 묶고, 민족성을 규정하며 우리의 정치적인 자주성과 능력을 묵살하는 것은 너무나 비역사적이다. 다시말하자면 긴 기간의 역사는 반드시 단계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또한 정치사는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경제적, 사회적인 요인과 겸해 다체로운 검토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즉, 당쟁과 당시의 사회 경제적 사상적 배경을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사건의 내용만을 천편일률적으로 서술화하는 것은 사건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실을 지나치게 선악의 관점이나 감정적인 태도에서 서술하는 것은 객관적인 태도가 아니다. ‘爭’이란 ‘쟁투’ ‘투쟁’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고 ‘정치’란 바르게 다스린다는 뜻이므로 긍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모든 일은 야누스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선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나쁜 측면에서 보면 나쁘게만 보이고, 좋은 측면에서 보면 좋게만 보이지만 같은 일에도 나쁜 면과 좋은 면이 동시에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용어를 쓸 것이냐도 중요하지만 그 내용을 어떻게 서술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2. 당쟁과 사림

  당쟁사는 조선후기 정치사의 중심이라고 할수있다. 조선후기의 정치는 사림이 주도하는, 사림이 정치주체가 되는 정치형태에서 권력투쟁, 정치운영이 붕당의 분파에 의한 대립과 투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림은 문자그대로 선비의 숲이란 뜻으로서 현직관료보다는 재야의 지식인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지식인인 이들은 경학에 뜻을 두었고, 그 경학의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림은 경제적으로 재지 중소지주적인 기반을 가지는 부류가 다수로서, 중앙집권체제보다는 향촌자치를 내세웠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들은 지방에서 기존세력의 부폐와 비리를 접하고 그들과 투쟁했기에 과거에 있었던 정치체제와는 다른 형태의 정치형태, 정치제제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붕당은 이러한 사림의 여론과 이해를 다변하는 것이었고 이들간의 상쟁이 당쟁으로 나타나게 된것이었다.

  또한 사림은 독서인층, 즉 유교교양을 갖춘 지식인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수행한 정치는 문신정치의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림정치는 곧 문신정치이고 문신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이 붕당정치로 나타난 것이었다. 붕당은 나름대로 명분과 주의 ‧ 주장이 있었다. 이들에게는 많은 사림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대의명분이 필요하였고 이해관계에 따른 정책이 있어야 하였다. 따라서 이상적인 사림정치 ‧ 붕당정치가 유지되는 한에는 공론과 공도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어 왔으며 이러한 공론과 공도는 유교이념에서부터 도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림정치 ‧ 붕당정치도 현실적인 정치권력의 장악과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는 음모와 비방과 추악한 권력투쟁이 없을 수 없었다. 이것이 붕당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일당전제로 치닫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면 대의명분에 입각한 입지를 잃고 사리사욕에 바탕을 둔 사당(私黨)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되면 공론‧공도는 무너지고 특정한 몇몇 가문이 독점하는 벌열정치로 치닫기도 한다. 세도정치가 바로 그것이다.

  권력투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있어 왔다. 그리고 권력투쟁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육과 보복이 자행되는 경우가 많다. 단 세계의 정치사를 보면 무력을 가진 사람이 집권한 경우가 많다. 文士가 정치주체가 되는 문신정치는 요즈음의 몇 몇 선진국을 제외하면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문신정치, 문치주의는 세계의 유례가 드문 정치형태이다. 문치주의가 발달한 곳은 중국과 한국이 대표적이지만 중국의 경우는 정복왕조가 많아 황제의 전제권이 강하여 문신들의 독자적인 역량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는 문신양반이 주도하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곳보다도 문치주의가 강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당쟁이 유례없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시시한 복상문제 따위를 가지고 시비를 한다든지, 정변에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든지 하는 것은 적당한 지적이 되지 못한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복상문제가 우스꽝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문신정치의 특수한 권력투쟁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시비거리였다. 여기서 이기면 정권을 차지할 수 있고 지면 정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쟁에서 희생된 사람수로 말하더라도 기껏해야 10여 명이 죽거나 70-80여명이 귀양가는 정도지만 무사정권에서는 정권과 무관한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죽게 하였지 않는가? 당쟁의 희생자는 권력층 내부에 국한되지만 무사정권에서는 이와 무관한 사람들의 많은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많이 죽인 지배자일수록 영웅 칭호를 부여받고 불과 몇몇의 권력자가 죽는 당쟁은 고질적인 민족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한다면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임진・병자란을 전후한 각각 200여 년간 승평을 누릴 수 있었던 문신정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Ⅲ. 맺음말


  본문에서 야누스적이란 말을 들어 설명한적이 있다.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하면, 지금은 '위선자'를 가리키는 재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실제로 야누스가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인용은 사실 공정하지 못하다. 로마의 신들 가운에서 가장 오래 되고, 또 가장 위엄을 갖춘 신이기도 한 야누스는 속임수를 쓰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집을 보호하기 위해서, 특히 건물의 출입문을 지키기 위해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얼굴은 들어오는 사람은 검문하고, 다른 얼굴은 집을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야누스는 집안의 안전과 도로의 보호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얼굴을 가진 로마의 신이 이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어느 경우라도 위선자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존재였다. 초기 영국의 저작들에서 야누스는 사실 굉장히 좋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야누스의 이름을 현대에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한 것은 샤프테스버리의 백작인 안소니 애쉴리 쿠퍼로, 그는《인간, 의견, 시간의 특성》속에서 '한쪽 얼굴로는 미소를 억지로 짓고, 다른 쪽 얼굴로는 노여움과 분노 외에는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는 작가의 야누스의 얼굴(이중성)'이라고 썼다. 그 표현은 이후 본래의 의미로 복귀시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누군가에게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고 말하면, 두 사람이 모두 신화를 다시 읽어 보지 않은 한 노여움과 분노를 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지금 붕당정치와 사림의 정치를 일컫는 당쟁이란 개념도 우리에게 변해버린 야누스의 의미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란 것을 연구함에 있어서 선악의 구분에 의한 판단이나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조선후기에 등장했던 붕당정치와 그 과정을 통해 파생된 부정적인 면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왜곡과 인식자체의 목적성을 직시하며, 그러한 인식의 뿌리에 대한 그것 자체의 온전함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쟁은 분명 조선후기를 지배했던 정치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그 시대의 성격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현재 우리의 좌표를 찾고 설정할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의 잘못을 일제학자들에게만 전가시킬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의 인식에도 잘못이 있을수 있다. 우리사회에 아직까지도 잔존해있는 여러 식민사관적인 사상과 인식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민족과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인식이 교육과 여러 서적을 통해 전파되어야 한다.

'study >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자성어  (0) 2010.04.28
1659년 예송논쟁에 대한 고찰  (1) 2009.07.11
삼국지위서동이전  (0) 2009.06.27
진서 부여전 (원문)  (0) 2009.06.27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