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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9년 예송논쟁에 대한 고찰 본문

study/한국사

1659년 예송논쟁에 대한 고찰

Schizo! 2009. 7. 11. 22:02

1659년 예송논쟁에 대한 고찰

 

1. 서론

 1) 문제제기

 2) 선행연구의 검토

 

2. 예송의 발생배경과 주요쟁점

 1) 예학적 배경

 2) 예송의 주요쟁점

 

3. 기해예송의 발생과 전개

 1) 효종의 죽음과 복상논쟁

 2) 윤휴와 송시열의 논쟁

 3) 윤휴와 허목의 논쟁

 

4. 예론의 정치분쟁화

 1) 윤선도의 복제상소

 2) 윤선도의 복제상소에 대한 논쟁

 3) 예론의 법금

 

5. 조선사에서 예송이 갖는 의미

 1) 예학적 의미

 2) 정치적 의미

 

6. 결론

 

 

 

 

1. 서론

 1) 문제제기

  조선 후기에는 사림정치가 전개되면서 주자학을 신봉하는 사림이 붕당을 형성하여 상호 경쟁적으로 정국주도의 쟁패를 벌이게 되었다. 붕당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사활을 걸고 싸울만한 주자학적 명분의 정당성을 논변하는 이념투쟁이었다. 이와 같은 사림집단에 의한 붕당간의 갈등을 배경으로 17세기에는 예학이 현실정치와 직결된 이른바 예론으로 쟁점화 되었다.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5월에 승하한 효종에 대해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예론 논쟁이다. 예론은 17세기 조선조 예학(禮學)의 발달과 더불어 나타난 조선조 사림정치 특유의 정치적 갈등을 의미한다. 당시는 예의 학문적 정리나 해설이 왕성하였을 뿐 아니라 예의 실제적 실천을 철저히 하려는 정신이 드높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인해 왕실의 복상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제기되는 각 붕당의 예론은 모두 다 예와 관련된 예학의 이념적 논쟁과 그들의 논쟁을 정당화 하는 명분을 표방하고 있었다. 이러한 예론을 통해 명분을 찾고 이를 바탕으로 각 정치세력들은 정치적 대결을 벌였다.1

  기해예송이 발생하자 송시열(宋時烈, 우암, 1608~1687), 송준길(宋浚吉, 동춘당, 1606~1672)등 서인은 ‘사종지설(四種之說)’과 고례(古禮)에 입각하여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 백호, 1617~1680)를 비롯한 남인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는데 이는 효종을 장자로 보느냐 차자로 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양파, 1602~1673)의 중재 하에 장, 차자의 구분이 없는 국제에 의거한 기년설이 왕에게 건의되며, 부왕의 상을 당해 정황이 없었던 현종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복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듬해에 3년복으로 개정할 것을 주장하는 허목(許穆, 미수, 1595~1682)의 상소로 인해 논쟁이 본격적으로 재연된다. 이때 양송과 허목의 치열한 논쟁의 와중에서 현종은 점차 3년설에 기울어지게 된다. 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제왕가로서의 예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허목, 남인의 예송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달에 올라온 윤선도(尹善道, 고산, 1587~1671)의 상소는 서인들이 효종과 현종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는 논리로 확대 해석될 수 있었고,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집권서인세력은 윤선도를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한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윤선도를 삼수에 위리안치 시켰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집권 서인세력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이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한다. 따라서 이후에 3년설을 주장하고 윤선도를 구원하는 상소가 간간히 이어지자, 현종은 집권 서인세력의 거듭되는 처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되도록 3년설 주장자들을 보호하고자 한다. 결국 1666년(현종 7년)복제논쟁 자체를 금지함으로서 더 이상의 문제의 소지를 없애는 선에서 1차 예송논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바로 17세기 후반 현종대 왕실의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붕당간의 명분론적 갈등 양상을 보인 기해 예송을 분석하고자 한다.

 

   2) 선행연구의 검토 및 연구방향

  본 논문의 목적은 조선 현종 때 발생한 예송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그 전개과정과 성격에 대해서 규명하는데 있다. 다만 연구 범위를 기해예송으로 한정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기해예송의 연장선상에 있는 갑인예송은 물론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데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배경은 기해예송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굳이 다루지 않아도 본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예송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경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송은 식민지 시대에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사소한 의전문제로 야기된 단순한 당쟁이나 권력투쟁’으로 보는 입장으로 평가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이러한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해 연구되었다.2

  근래에 이르러서는 역사학계와 철학계에서 당쟁사 및 유교 철학사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예송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새로운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다.3 이러한 연구들에 의해서 조선 후기 현종대에 있었던 예송이 종래의 부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 결과 예송을 17세기 예학의 발달 및 학파간의 견해와 정치적 이념의 차이에서 야기되었던 왕실의 상례문제를 둘러싼 정파간의 복제논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

  근래에 예송을 다양한 측면에서 고찰한 선행연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원영은「조선후기 붕당의 명분론적 갈등에 대한 연구」에서 기해예송은 붕당을 매게로 한 사림세력간의 갈등 양상이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적 명분론의 뒷받침을 받는 예론을 이념적 근거로 삼아 명분을 독점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의 내면 상으로는 각 정차가 제기한 예론과 그 명분은 군신간의 권력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집권 서인 송시열은 대신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자간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기년설의 예론을 제기했던 반면 야당인 남인 윤휴는 훗날의 정치 세력의 재편을 위해 당시에는 세자인 유충한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하는 삼년설의 예론을 주장했다고 본 것이다.4

  금지윤은「17세기 예송논쟁과 서인의 집권 과정」에서 기해예송은 효종의 비정상적인 왕위계승이 안고 있었던 종통 문제의 필연적인 발로였으며 17세기 급격히 발달한 예학에 대한 서인과 남인의 학문적 견해 차이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보았다.5

  김상희는「17세기 예송의 정치사적 의미의 재해석」에서 기해예송당시의 대립이 단지 학문적인 대립이 아닌 정치적인 인식의 차이가 첨예하게 대립한 끝에 각기 다른 당론적인 입장이 예론과 결합되어 당쟁의 핵심적 쟁점으로서 표출된  것이라고 이해하였다.6

  이에 본인은 우선 예송의 배경을 예학적인 측면에서 고찰하고 다시 정치적인 배경을 중심으로 예송의 주요쟁점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기해예송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송시열과 그에게 맞서는 윤휴, 허목, 윤선도의 주장과 그들의 사상적인 배경에 대해서 알아볼 것이다. 또한 마지막으로 조선사에서 예송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2. 예송의 발생배경과 주요쟁점

  1) 예학적 배경

  예송의 뜻을 직역해보면 ‘예에 대하여 송사한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예송은 예에 대한 문제제기와 상소로 진행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사회에 있어서 ‘예’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학에서는 예를 인을 발현시키는 가치관의 실현이면서 또한 사회의 질서를 부여하고 인간관계를 친화하게 하는 윤리, 도덕이며 국가체제로 보았으니 주례, 의례, 예기등 삼례가 바로 그를 반영한 것이다. 천인합일을 주장하는 성리학에서 주자는 예란 현실세계에서 천리의 도리에 맞게 빛낸 것으로 정치, 사회적인 규범이며 인간의 사회관계에 있어서 지켜야 할 행위규범이라 하였다.

  이러한 예는 개인적으로 자기 수양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바르게 하고 사회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이 각기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알맞은 역할과 행위규범을 체득하게 한다. 이를 통해 예는 정치적으로 통치자와 피치자간의 상하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7

  조선 건국 초기에 예제 정비의 일환으로 마련된 예에는 크게 왕조례와 사대부례로 구분된다. 왕조례란 제왕가의 예제로서 길, 가, 흉, 군, 빈례의 다섯 편목으로 국가전례내지 왕실의례를 규정한 예서이다. 이에 비해 사대부례는 사서인의 예법으로서 사례가 중심이 된다. 제왕가의 왕조례는 중국 고대 주공의 고전예제에서부터 비롯되어 한 대에 의례, 주례, 예기 등으로 정비되었고 반면에 사대부예제는 처음에는 왕조례의 극히 작은 부분으로 되어 있었으나 남북조 시대부터 그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하여 송대에 주자에 의해 그 체계가 확립되면서 주자의 권위에 편승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예법의 전통이 되기도 하였다. 가례는 초기에는 상례의 일부가 『국조오례의』에 참작되어 있을 뿐 널리 유행되지 못하다가 17세기에 들어와 예학자들에 의한 가례연구가 심화되면서 예제도 서서히 왕조례에서 사대부례 중심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 중심적 왕조례는 기본적으로 천자 및 왕족, 공족의 의례를 제도화 하였기 때문에 귀족사회의 예제로서 신분적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반면 가례중심의 사대부예는 예의 적용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신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가례중심의 예학자들은 왕실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가례를 적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17세기는 왕조례 중심에서 사대부례 중심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고 사대부례가 보편화된다고 해도 왕조례의 특수성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왕위계승이나 국가전례에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현종대의 두 차례의 예송은 바로 이러한 문제로서 표출된 것이다. 이는 효종이 가통 상으로는 차남이지만 동시에 왕통상으로는 대통을 계승한 적자였던 데에서 기인한다.8

  당시의 정치 주체들 간에는 제왕가의 예와 사서인의 예를 분별하는 것을 놓고 전자에 우선적 비중을 두는 입장과 후자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입장으로 분화양상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와 같이 예론상의 상이한 입장이 때마침 제기된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쟁투를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7세기는 양난으로 인해 해이해진 예제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예가 더욱 중시되었고 성리학의 발전과 함께 예는 단순히 외부에서 강요되는 것이 아닐라 자율적으로 실행해야 할 당위규범으로 인식되었다. 즉 당시는 예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면서 예치가 강조되었고 이에 예학 연구도 심화 발전하여 예학의 시대라고 할 만큼 예학이 흥성하였던 것이다.

  예학은 서, 남인을 막론하고 중시되었지만 학풍에 따라 그 경향을 달리하였다. 사계 김장생(金長生, 사계, 1548~1631)에서 비롯된 서인 측의 예학은 주자가례에 기본을 두고 있다. 즉 그의 예서에는 주자의 가례를 고례로서 고증하여 보완하여 체계화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그의 예학은 주자의 가례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자연히 그의 예학은 아들이자 수제자인 김집(金集, 신독재, 1574~1656)에게 계승되고 다시 송시열에게 전승되어 집권세력으로서의 서인예론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반해 남인 측의 예학은 근기 남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정구(鄭逑, 한강, 1543-1620)에서 비롯된다. 그의 예학 경향은 주자가례 일변도의 예학 풍에서 탈피하여 북송제유의 예설에 시야를 확대시켜 주자의 예설을 그 한 부분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특징으로 드러난다. 또한 왕가례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주자가례가 중심이 됨으로서 생기는 형식 위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삼례에 거슬러 올라가 예의 본원을 추구하였으니 그의 고례에 중점을 두는 사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이후 허목이나 윤휴의 육경(六經)중심의 학풍으로 이어지며 치도(治道)를 현실에 적용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9

  예송에서 송시열이 의례 가공언소(賈公彦疏)에서 사종지설을 내세우면서도 마지막으로 신의경의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정태화에게 제시한 것은 서인 예론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에 반하여 남인의 경우는 고례에 소급하여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등에 입각하고 있다. 이러한 예론의 차이는 서인이 주자학 절대 신봉을 주장하는 반면 남인이 원시유학인 육경을 중시하면서 고학적 복고성을 보이는 학풍을 조성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예송은 서인측의 기년설에 대해 삼년설로 맞서는 남인측과의 단순한 견해 차이에서 출발한 듯 했으나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의 예학적인 인식의 차이가 뚜렷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론에서의 승리는 권력의 장악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예송이 치열한 양상을 띄고 진행되었던 것이다.10

 

  2) 예송의 주요 쟁점

  예송의 주된 쟁점은 효종(孝宗)이 왕통을 이은 적자이면서 가통 상으로는 차자였기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여 적자로 대우할 것인지 아니면 비록 왕이지만 종법이 우선이므로 차자로 대우할 것인가에 있었다. 현종(顯宗)대의 예송발생의 중요한 정치적인 환경요소로는 인조, 효종 년간의 정치사에서 문제시되는 소현세자의 사망과 김상헌의 귀국으로 말미암은 인조 23년 4월 이후의 정국의 새로운 국면과 관련된다. 정묘,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정국은 친청세력과 반청세력의 대립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심기원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하여 대립 양상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인조 22년 3월 공신 심기원이 중심이 되어 인조를 몰아내고 무인들이 정권을 잡아 대청항쟁을 벌이기로 했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인조폐위설이 가세하면서 이 사건은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미 이전부터 세자가 청인과 잦은 접촉을 가지면서 새로운 문화와 문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점 등으로 인하여 인조는 세자에 대하여 이미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상황이었다.11

  이러한 상황에서 병자호란 이후 볼모로 청에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김상헌등과 함께 귀국하지만 인조는 이들에게 시종 냉대했으며 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만에 급서하게 된다. 또한 이듬해에 인조는 강빈의 옥사를 일으켜 소현세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이기도 한 강빈과 그 일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다시 소현세자의 세 아들(석철, 석린, 석견)을 제주도에 유배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당시 조선의 종법을 지키지 않고 왕위계승을 변칙적으로 하려고 한 데서 빚어진 결과이다.

  당시 종법에 의하면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집안에서 부모에 앞서 자식이 죽으면 종통을 잇는 적장자에 대해서 삼년상을 입지만 그 이하 차자의 경우에는 일년상을 입게 하였다. 그리고 종통은 적장자(嫡長子)만이 이어 받을 수 있고 적장자가 부모에 앞서 죽게되면 적장자의 아들인 적장손이 이어 받고 만약에 적장손이 없는 경우에는 양자는 세워 종통을 이어 받게 했다. 이것은 왕위계승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지금의 헌법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며, 성리학 이념의 핵심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종법에 의하면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후 세자는 아우인 봉림대군이 아니라 맏아들 석철이어야 했다. 하지만 인조는 그 종법을 무시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며 인조 27년에는 봉림대군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책봉하여 종법의 원칙에 따른 정통성을 확립하려 한 것이다. 당시의 이러한 결정에 대부분의 조신들이 반대하고 봉림대군 자신도 원자의 승계가 순리이며 자신의 책봉은 부당한 조치임을 인정하였으나 부왕 인조가 주도하고 외척이었던 김자점이 배후에서 조정하여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후 1650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그는 송시열, 이유태, 김상헌등의 사림을 대거 조정에 등용하게 된다. 왕위계승명분이 약했던 효종은 사림의 등용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마련한 후 오랜 기간에 걸쳐 조선시대의 정치와 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북벌론을 통해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효종 2년 강빈의 옥사를 주도했던 김자점이 역모혐의로 제거되면서 서인관료들은 강빈옥(姜嬪獄)에 대한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효종의 입장에서 볼 때 강빈옥은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만약 강빈옥이 무고라면 이는 효종의 국가지배정통성에 문제가 제기되며 따라서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는 효종의 왕위계승에 관한 부당성을 지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 여부가 달린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12

  이러한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 논란은 아들인 현종에게 있어서도 민감한 문제였다. 단순한 왕실의 복상문제로 시작되었던 예송이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효종의 상에 적장자가 아닌 차자의 예에 따라서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기년복을 입게 된다면 효종이 종법을 무시하고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연히 그 정통성 여부에 관해 문제가 제기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아들인 현종 또한 그 논쟁을 피해갈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되면 왕통을 이어야 할 사람은 현종이 아니라 당시 생존해 있던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인 석견이라는 주장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더욱더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인조-효종-현종의 정통성이 광해군의 대북정권을 축출하고 성립된 서인정권에 의해서 확립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예송에서의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은 바로 정권교체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예송은 당시 학계, 정계를 망라한 거국적인 쟁점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3

  

 3. 기해예송의 발생과 전개

  1) 효종의 죽음과 복상논쟁

  1659년 5월 효종이 승하하면서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을 위하여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문제되었다.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논쟁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효종은 인조의 적자이기는 하지만 차자로서 왕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삼년복을 강복하여 차자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올 수 있고 왕통을 이었으니 적통도 아울러 갖는 것으로 보아 삼년설을 주장할 여지도 있었다. 이 논의는 잘못하면 효종의 왕위계승의 정당성 여부를 판가름할 문제와 직결될 수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었다고 파악된다. 더구나 당시 인조의 적장자였던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석견이 생존해 있었고, 효종의 재위기간에도 인조가 대청관계에 있어서 강경파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하여 강빈을 억울하게 죽게 한 처사가 잘못되었다는 사림의 비판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예조에서는 복제문제를『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되어있는 복제에 의거하여 추진하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자의대비가 차자로서 입승대적한 효종을 위하여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국조오례의에는 명시되어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복제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되니 이에 당시 왕세자였던 현종은 “상례일체를 두 찬선에게도 함께 문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두 찬선은 송시열과 송준길을 가리킨다.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은 1658년(효종 9년)이래 효종으로부터 특별한 신임을 받아 북벌정책을 비롯한 국정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 다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제자였으므로 복제문제에 관한 한 이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한 결과 영돈령 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연양부원군 이시백, 영중추 원두표등이 모두 “고례에는 이 경우의 복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장차자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 시왕의 제도인 『대명률(大明律)』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이조판서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도 “의례의 상복소에 ‘비록 승중(承重)한 아들이라도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구절이 있으니 효종이 비록 왕통을 이었으나 다음 적자서열이니 이번 국상에 대왕대비가 입어야 할 복제는 1년을 넘을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할 것을 동의하였고 이에 현종도 의논대로 따르라고 하였다.14 승중이란 조상의 제사 받드는 중임을 이어받거나 장손으로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을 말한다. 양송이 여기에서 쓴 승중이란 전자를 뜻하며 효종은 장자가 아니므로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자의대비 복제는 삼년복이 아닌 기년복이라 한 것이다. 결국 이들의 견해는 비록 임금이라 해도 예법을 초월할 수 없으며 왕가의 특수성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2) 윤휴와 송시열의 논쟁

  송시열등 서인들의 기년설에 맞서 윤휴가 제시한 참최삼년설(斬衰三年說)은 장자를 위해서는 상, 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내외종이 다 참최를 입는다는 설이다. 당시 서인 대신들은 물론 양송과 같은 유신들도 1년설을 주장하자 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복으로 확정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쟁쟁한 대신들과 양송의 견해를 정면에서 반박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전지평 윤휴였다. 그는 『의례주소』의 상복참최장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해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가씨의 주를 인용해 송시열의 논리를 반박하고 나섰다. 이를 가소라 하는데 이는 『의례』정현의 주에 붙인 당나라 가공언의 소를 말한다.

  윤휴의 이른바 참최삼년설은 연양부원군 이시백을 통하여 편지로 영의정 정태화에게 알려졌고 정태화는 다시 송시열과 의논하였다. 윤휴가 제시한 참최삼년설은 장자를 위해서는 상,하 구분 없이 삼년복을 입으며 임금을 위해서는 내외종이 다 참최를 입는다는 설이다. 윤휴는 가씨의 주에서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세워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는 구절을 취하여 자의대비는 효종에 대해 참최삼년설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이러한 예론을 통해 군신의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군왕중심 왕도정치론의 명분을 제기하였다.

  윤휴는 제왕가의 예는 사례와 현격히 다르다고 하고 또 ‘무왕이 문모(무왕의 어머니 태비)를 신하로 삼았다’는 무왕신모설(武王臣母說)을 인용하여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있다는 신모설을 들어 반박하였다. 이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인데 주나라 무왕은 “나는 열 명의 어진 신하가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으며 공자는 이에 대해 “그 중에 부인이 한 사람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무왕이나 공자는 그 부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밝히지 않아 후세의 학자들은 그 부인을 어머니인 문모로 보기도 하고 무왕의 아내인 읍강으로 보기도 하는 등 논란이 있던 조항이었다.

  이와 같은 윤휴의 군신의 의리 명분을 강조하는 참최삼년설에 대해 송시열은 윤휴가 인용한 의례주소의 상복참최장의 가씨 주를 들어 반박하였는데 “의례주소에 그런말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아래에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도 역시 서자라고 칭한다’하니 즉 서자란 첩의 자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모든 아들을 뜻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 송시열은 다음과 같은 모자의 차원에서의 의리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박하고 있다. 윤휴의 주장에 대해 송시열은 내종부녀가 모두 신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의대비는 내종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내종이 임금에게 참최복을 입는 것은 비록 임금의 사척일지라도 군신의 의리가 지엄하기 때문에 임금을 사척으로 대할 수 없어서 신하로 처신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의대비는 효종의 어머니였다는 모자의 의리뿐만 아니라 또 둘 사이에 군신의 의리가 있어서 효종이 자신을 아들로 일컫지 못하고 신하로 일컬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의대비가 이제는 효종에게 신하가 되어 임금에 대한 복을 입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한 송시열은 윤휴의 신모론에 대해서도 주자가 이미 유시독의 말을 들어 아들이 어머니를 신하로 삼는 법이 없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고 하여 신모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휴의 신모론은 패륜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등 서인 사대부들의 강한 반감을 초래하였다.

  송시열은 이어 승중은 했으나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네 가지 예외규정인 사종론을 들어 기년설이 적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송시열은 단 ‘서자’라는 용어가 앞뒤에서 다른 뜻으로 쓰여 차장자삼년설의 논거도 될 수 있는 불명확한 점이 있다고 피력하였다. 사종지설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정체불득전중(正體不得傳重)’으로 장자가 병이나 기타사유로 제사를 받들지 못하고 차자나 손자가 제사를 승중했을 경우 부모는 3년복을 입자 않는 다는 말이었다. 여기에서 ‘정’이란 적자와 적손을 뜻하는 말이고 ‘체’란 직접 혈통을 이은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두 번째로 ‘전중비정체(傳重非正體)’로 서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를 뜻한다. 세 번째로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서자를 내세워 후사를 삼은 경우이며 마지막 네 번째는 ‘정이불체(正而不體)’로서 적손이 후사를 이은 경우로써 할아버지가 손자의 상에 삼년복을 입지는 않는다는 말이다.15

  현종실록에 따르면 송시열이 사종론의 설명을 통해 대행대왕인 효종은 체이부정에 해당되고 소현세자의 아들은 바로 정이불체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정태화는 깜짝 놀라며 말을 못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예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소현세자의 아들이 있는데 누가 감히 그 설을 인용하여 지금 논의하는 예의 증거로 삼겠습니까?”라고 하였다.16 실제로 현왕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효종을 ‘서자’나 ‘부정’으로 표헌하는 것은 왕조국가에서 지극히 민감한 문제이고 그만큼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태화는 소현의 아들이 살아있는 판국에 이것을 예로 들다가는 종통문제와 관련된 심각한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감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그는 “국조 이래로는 아버지가 아들 상에 모두 기년을 입었다고 들었다”면서 국제를 쓸 것을 제안하였다. 송시열은 “『대명률』복제 조항에도 그 복제가 기록되어 있다”면서 정태화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정태화가 국제의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는 장자, 차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는다는 조항을 채택하여 자의대비가 효종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게끔 결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고례』에 근거한 기년, 삼년설을 다 버리고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장자, 차자 구분없이 모두 기년을 입게 한 규정 이른바 국제기년설을 건의하여 시행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정태화가 말하는 ‘사단’이란 효종을 차자로서 체이부정이라 하여 자의대비가 삼년복을 입지 않고 기년복을 입는다고 한다면 가뜩이나 소현세자의 셋째아들 석견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효종의 정통성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자의대비의 복제가 내포한 종통 문제란 바로 적손을 제쳐두고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법상의 지위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주체들 간에는 제왕가의 예와 사서인의 예를 분별하는 것을 전제로 왕조례의 특수성에 우선적 비중을 두는 『예기』,『의례』등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는 이른바 고례를 숭상하는 예론적 입장과 그리고 송대 주자의 예학체계의 전통을 계승하여 『가례』중심의 사대부례를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입장으로 분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론 상의 상이한 입장이 때마침 제기된 복상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쟁투를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17

  이처럼 논란이 격화되면서 곤혹스런 처지에 빠진 인물은 현종이었다. 그는 내심 삼년설이 맞다고 여겼겠지만 이 논란이 계속될 경우 왕실의 권위에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여겼고 논쟁이 효종의 정통성 여부에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우선 『국제』에 의거해 기년복으로 정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또한 『국제』에 따른 기년복의 결정이 현종의 입장으로서도 크게 불리할 바 없다는 계산이 작용했다. 현종은 『국제』에 장자와 차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효종이 적통과 종통을 이은 인물로서 기년복을 입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앞에서 서술한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로 당시 복제 논의에서 자의대비의 복제가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아 여러 가지 논의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둘째, 복제논의의 초기단계에서 남인 윤휴의 참최삼년설과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이 대립하게 되었는데, 송시열이 윤휴의 설을 반박했던 모자간의 의리를 강조한 기년설의 명분은 당시 효종이 갑자기 승하함에 따라 최고정치권력이 자의대비 조씨에게로 한정되었던 권력의 쏠림 현상에 따른 군신간의 실질적 권력관계와 관련된 이해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비는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았다. 후계왕이 정해지지 않았을 경우에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후계왕이 어릴 경우에는 수렴청정을 행함으로써 왕조의 실질적인 군왕으로 군림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대비는 자신의 친정을 후원하는 배후세력이 됨으로써 외척세도의 실세노릇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는 대체로 왕이 대비의 친생자가 아닌 계모일 경우에 특히 더했다. 따라서 서인과 남인이 주창한 예론과 명분은 단순하게 양대 붕당의 고정적인 예학상의 입장 차이만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으며, 최고정치권력의 향방에 따른 이해관계에 의해 제기된 측면도 있었다. 셋째,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정태화와 송시열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국제의 기년복으로 의정하고 현종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국제는 『경국대전』에 실린 것을 말하며 여기에 『대명률』을 참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제 논의는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이 될 수 있음을 알 수있다. 송시열이 사종설을 거론하면서 소현세자를 언급했을 때 정태화가 송시열의 말을 막는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에 소현세자의 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제든지 종통문제가 제기될 수 있었다.18

  또한 국제 기년복은 그 자체가 문제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즉 『경국대전』의 국제 조항에는 “아들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라고만 규정되어 있을 뿐 그 아들이 장자인지 중자인지 구별을 하지 않았다. 이 조항을 효종의 복제에 적용할 경우 효종의 종법상의 지위가 장자인지 차자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뒤에 복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에도 현종은 기해복제를 장자에게 입는 기년복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반면, 송시열 등 서인들은 가공언의 사종설에 따라 차자에게 입는 기년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3) 허목과 송시열의 논쟁

   허목이 양송의 기년설에 맞서 주장한 재최삼년설(齋衰三年說)은 왕가의 예법은 일반 사대부와 다르며 장자가 죽으면 본처 소생의 차자가 장자가 되기 때문에 자의대비의 복제는 삼년설이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제 논쟁에 복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단 이틀(기해년 5월 4-5일)만에 결정된 것으로 후일에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 복제문제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이듬해인 1660년 3월 효종의 탈상을 두 달 앞둔 시점에서 허목이 복제에 관해 상소하면서부터였다. 허목은 당시 도성 밖의 지방으로 나가 있다가 자의대비의 상복이 국제기년복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년이 지나 탈상되기 전에 그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여 이 때 상소를 올린 것이다. 당시 삼년설을 주창했던 허목은 우선 윤휴와의 논의를 통해 자신의 주장이 합당한지 확인한 다음에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그는 윤휴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허목은 『의례』주소에서 “제일자가 죽으면 적처소생의 제이자를 후사로 세우고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는 구절을 근거로 하여 효종을 인조의 종통을 이은 장자로 단정하였다. 여기서 당시 논의되고 있던 문제는 자의대비가 효종에게 입어야 할 복상이었다. 그런데 허목이 『의례』 상복의 재최장의 ‘모위장자(母爲長子)’를 인용하지 않고, 『의례』 상복 참장의 ‘부위장자(夫爲長子)’를 인용한 것은 아버지의 복상이 결정되면 그에 따라서 어머니의 상복은 자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둘째, 허목은 『의례』 상복 재최장의 ‘모위장자’에 의거하여 조대비가 효종을 위하여 재최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허목은 『의례』 상복 재최장의 장자복을 인용하여 자의대비의 복을 재최삼년복으로 결정하려고 한 것이다. 어머니가 장자에게 입은 재최삼년설은 ‘정체’에 대한 예이다.

  셋째, 허목은 사종설 중  ‘체이부정’의 서자(庶子)를 첩자(妾子)로 간주하였다. 그는 사종설 중 ‘체이부정’의 서자를 첩자로 간주하는 이른바 서자첩자설을 주장하여 효종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체’를 적자에서 적자로 이어진 경우라고 하고, 그 경우 삼년복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차자로서 종통을 이어도 삼년복이라고 하였으니 다시 말해 차자로서 종통을 이으면 ‘정체’가 된다는 것이다.

  넷째 허목은 천자, 제후라도 정통 친후와 그 부인, 장자와 장자의 처에게는 강복할수 없고, 서자(첩자)로서 후사가 된 자에게만 기년복을 입는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허목은 효종이 인조의 차장자로서 종통을 받든 정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논의에 근거하여 허목은 효종이 인조의 차장자로서 “대통을 이어 즉위한 정체의 지존”이며, 효종이 체이부정의 서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대왕대비께서 효종을 위해 재최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가공언의 사종설을 소개한 다음 “지금 효종으로 말하면 대왕대비에게는 이미 적자인 것이고 또 왕위에 올라 존엄한 ‘정체(正體)’인데, 그의 복제에 있어서는 ‘체이부정’으로 삼년을 입을 수 없는 자와 동등하게 할 수 없다”고 재차 강조하였다.

  여섯째 차장자로서 승중한 자를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는 말은 경전에없다고 주장한다. 허목은 “첫째 아들이 죽어 이미 삼년복을 입었기 때문에 차장자는 장자가 되어 승중을 하였더라도 당연히 기년의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은 경문에 나와 있지 않다고 하여 거부하였다.

  위에서 서술한 허목의 상소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허목은 기해년의 복제가 송시열의 기년설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여 삼년설을 제기한 것이다. 여기서 허목이 강조한 것은 효종이 종통을 이은 정체였다는 것이다. 효종은 적처 소생의 제2장자였지만 제1자가 죽은 후에 정식 후사로 세워져 장자로 부르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후사로 정하기는 하였으나 아버지가 참최를 입지 않는 『의례』의 네 가지 예외규정의 하나인 ‘체이부정’ 즉 서자가 승중한 경우에 대하여 송시열 등은 이때의 서자를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 곧 ‘중자(衆子)’로 해석하였으나 허목은 이를 글자 그대로 첩자로 해석하였다. 사실 예송정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였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서자’의 해석문제였다. 서자란 용어는 원래 중자와 첩자 두 가지 개념을 아울러 가진 것으로, 바로 복제문제를 둘러싼 논의의 전개가 되었던 『의례주소』안에서도 어느 경우에는 ‘중자’로 어느 경우에는 ‘첩자’로 정의되어 있었다. 허목은 ‘체이부정’의 서자를 첩자로 단정하였으나 그에 따른 설명은 붙이지 않았는데 그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이 때문에 효종은 인조가 참최를 입을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재최삼년복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천자나 제후는 기년 이하의 복을 입을 관계에 있는 경우의 상에 대해서는 이를 생략하고 실제로 복을 입지 않지만 정통의 자손이나 그 부인들에 대해서는 강복할 수 없기 때문에 기년으로 강복할 수도 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허목의 논리에서 본다면 효종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정통의 장자라고 할 수있고 이 때문에 자의대비의 복제를 기년으로 정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허목의 예론은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는 그의 주장은 효종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었기 때문에 강점을 가지고 있었다. 허목의 주장은 윤휴의 참최설에 비해 다소 온건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효종의 종통을 명백히 하고 그 정통성을 확고히 하려는 입장은 일치하는 것이다.19  

  당시 자의대비의 탈상이 한 달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다시 이의가 제기되자 서인들은 당황했다. 더구나 자의대비의 기년복은 효종을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라는 허목의 지적은 서인으로서는 뼈아픈 것이었다. 송시열이 정태화와 나눈 대화는 비록 왕통은 효종에게 있을지라도 종통은 소현세자에게 돌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송시열은 분명 효종을 인조의 서자, 즉 체이부정으로 본 것이었다.

  현종은 대신과 유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기년복을 주장한 송시열이 반박에 나서야 했으나 그때 향리에 있었으므로 좌참찬 송준길이 나서서 허목의 이론을 반박했다. 송준길은 서자를 적장자 이외의 여러 아들, 곧 중자로 파악하였는데, 서자를 중자로 볼 경우 앞의 “제2장자도 또한 장자라고 부른다”와 모순이 되므로 그는 전설의 ‘제일자사’를 미성년에 죽은 아들로 보았다. 이 경우에는 제이장자를 후사로 세우고 장자라고 부를 수 있으나, 제일자가 성년이 된 후에 죽어 부모가 그를 위해 삼년복을 입었으면, 그 후에 제이장자를 후사로 세워도 장자로 부를 수 없고 삼년복을 입을 수도 없다는 것인데, 이는 참최를 두 번 입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송준길 뿐만 아니라 송시열은 또 왕에게 면담을 청하여 직접 기년설의 타당성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허목은 다시 상소를 올렸는데, 이번에는 『의례주소』의 『장자를 위한 상복도』를 첨부하여 올렸다. 그는 여기에서 이른바 서자의 개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을 첩자로 보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는 이것이 중자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특별히 적장자와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 등 극히 제한적인 경우일 뿐이며 보통의 경우는 첩자의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또 적서의 구별은 엄격한 것인데 적자를 함부로 서자라고 병칭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일자인가 아닌가에 있지 않고 조부의 대통을 잇는 정체인가 아닌가 하는 점인데, 효종은 인조의 적자로서 종묘를 받들어 계승하여 일국의 임금이 되었으므로 장자의 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허목은 첨부한 상복도에서 복제에 관한 모든 경전 근거들을 상세히 열거하고 보충 설명을 붙였다.

  이 논쟁 도중에 예조에서 대신들의 헌의 수합하여 보고하였데, 그것이 의하면 영돈녕 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등은 비록 이전의 고례에 의한 기년설을 고수하였으나 당초 주장에서는 한발 물러선 상태였고 판중추 원두표(元斗杓, 탄수, 1593~1664)는 “사종설이 대체로 부왕이 서자상을 당했을때의 이름이지 왕릉을 이어받고 사직을 맡은 적자에 대하여 기년으로 강복한다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아예 당초의 기년복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했다.20

  이경석과 원두표, 정태화 등이 이처럼 자의대비의 복제에 문제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나선 것은 이들이 ‘체이부정설’이 갖는 위험성을 감지한 까닭도 있었지만 이때만 해도 허목의 문제제기를 정치 공세라기보다는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여긴 때문이기도 했다. 경전 해석이 삼년설이 옳다면 굳이 기년설을 고집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대왕대비의 복제에 관해 당시 낙향해 있던 좌찬성 송시열이 허목, 윤휴, 원두표등의 삼년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기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장자가 어느 때 죽었는가에 중점을 두어 성인이 되기 전에 죽으면 그 후에 제 이자를 세워도 장자로써 삼년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에 죽으면 비록 제이적자를 세워 승중해도 서자라 하고 삼년복을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송시열이 효종을 서자로 표현했던 것은 중자의 의미이지 첩자로 단정한 것은 아니라고 한 것이며 허목의 말대로 한다면 그 부가 이미 참최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적자가 다시 장자가 되어 또 죽으면 두 번 참최복을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였다.

  여기에서 송시열은 특히 왕실의 예와 사가의 예가 근본 정신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가와 국이 같지 않다’는 허목의 주장에 대해 송시열은 동일한 원리라고 주장하였는데 『의례』의 ‘통상하(通上下)’라는 말은 사대부의 아들이 가계를 계승하여 제사를 주관하는 일과 세자가 왕통을 이어 나라를 맡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다. 사가와 국가의 예가 같지 않다는 설은 납득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따라서 허목의 입장은 국가와 사가를 명백하게 분리하고 국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는 반면, 송시열의 주장은 국가와 사가의 연속적 측면을 강조하여 국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국가의 권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려는 논리이다. 이는 바로 주자학의 예의 신분초월 관념을 보여주는 것이다.

  허목은 송시열의 반론을 보고 나서 다시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는 세 번째 상소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후 윤선도의 상소로 정국이 급속도로 경색되자 상소하지 않았다. 허목은 이 상소에서 “중히 여길 바는 나라의 대통에 있는 것이요, 적, 서, 장, 소는 논할 바가 아닌 것”이라고 하면서 일국의 왕으로 군림한 효종의 현실적 권위를 존중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윤선도의 상소에서 더욱 구체화 되고 강조되었다.    허목의 복제 관련 예론은 기해예송 당시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이후 남인의 예설의 기초와 원형이 되었으며 훗날 일어난 갑인예송에서는 현종에 의해 채택됨으로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국가의 원로로 대접받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예학적 의리와 명분이 효종의 종통을 수호하고 왕실의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서 그 권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왕실의 예를 사대부가와 같은 차원에서 논의하고 비록 복제와 종통을 연계시키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효종에 대해 중자 혹은 서자의 복을 주장함으로써 그 정통성에 의혹의 여지를 남긴 송시열의 예설은 기본적으로 왕실 입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송시열도 물론 효종의 정통성에 이의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왕실전례의 속성과 당시의 정치적 풍토에서 그러한 혐의를 쓰고 궁지에 몰리는 것은 필연의 추세였다.21

  논쟁이 치열해지자 사관은 현종에게 실록을 참조해 덕종, 예종, 인종, 순회세자(13세에 죽은 명종의 세자)의 장례 때 복제를 적어 바쳤다. 조선은 원래 아들의 장례 때 삼년복을 입는 제도가 없었으며 따라서 모두 기년복을 입었다고 되어 있었다.

  정태화등은 모두 의논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고 실록에 실린 대로 따르자고 말했고 현종 또한 다수의 대신들의 의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22 송시열이 나름대로 근거를 내세워 삼년설을 반박했으므로 서인 대신들은 다시 송시열의 의견에 따라 기년복이 맞다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현종은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자의대비의 복제를 원래대로 기년복으로 결정하였다. 서인은 이것으로 예송논쟁이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들은 왕가와 사가는 다르다는 윤휴와 허목의 주장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지나갔기 때문에 논쟁이 다시 재연될 여지가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4. 예론의 정치분쟁화

 1) 윤선도의 복제상소

  윤휴의 복제결정에 대한 문제제기와 허목의 상소로 야기된 기해예송은 양송의 반박으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당시는 집권당인 서인의 정국이었기 때문에 정태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기왕에 결정된 국제를 근거로 국제기년설을 고집했으나 우의정 원두표만은 당초의 견해를 고쳐 허목의 삼년설을 지지하였다. 이 무렵 조정의 분위기는 상당히 삼년설에 기울어진 듯이 보였다.

  그런데 이때 부호군 윤선도가 상소를 올림으로써 기해예송의 복제를 둘러싼 논쟁의 진행에 일대 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윤선도의 복제소(服制疏)는 기해예송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고 그가 제기했던 종통, 적통론은 왕실 전례 논쟁을 정치분재화 하여 정국을 분열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또한 이 시대의 전형적인 정치적 갈등인 당쟁의 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인조반정 이후 당시까지 상호공존의 원리에 의해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어오던 집권당인 서인과 야당인 남인의 정치상호원리를 파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따라서 윤선도의 상소에서 제기된 종통, 적통론은 자세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23

  그의 상소는 대체로 허목의 재최 삼년설을 지지한 것으로서 그 근거와 논리를 보충하기 위해 오복제의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고, 새로이 효종 적장자설을 내세웠으며 적통종통설(嫡統宗統說)을 제기하여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설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즉 그는 송시열 등의 중자설이 효종의 적장자 지위를 부정함으로써, 그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고 종통과 적통을 분리시키려 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또 여기에 덧붙여 송시열의 정치적 실책과 개인적 과오에 대한 심한 인신공격을 가하였다.24

  윤선도의 복제소의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그는 이른바 이종설로 지칭되는 적통, 종통론을 제기하면서 송시열의 설을 비판한다. 즉 이종설은 송시열이 “장자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는데도 차장자를 모두 장자라고 하여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이 엄하게 못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차장자설을 부인하는 송시열의 체이부정설이 안고 있는 논리를 확대 해석하면 효종의 적통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름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왕위계승의 정당성과도 관계될 수 있어서 매우 민감한 부분이었다.  물론 송시열등이 주장한 기년설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거나 소현세자의 적통을 인정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의례』에 모순이 있는 것으로 보았고 이 때문에 기년, 삼년을 단정할 수 없다면 『대명률』과 『경국대전』에 규정된 기년복을 시행하자는 주장이였다. 그러나 예제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는 한 기년설은 효종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예론으로서는 결점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삼년설은 효종에게 바로 종법상의 적장자의 지위를 부여함으로서 그 적통, 종통의 수립에 완벽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서인들은 복제와 왕통은 별개의 문제라고 변명했으나 이미 왕의 정통성의 문제는 복제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이 되고 만 것이다.

  둘째로 윤선도는 적장자설을 주장하여 송시열이 “인조가 효종을 서자로 여겨 삼년복을 입지 않을 것이므로 모후가 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는 설을 비판하였다. 그는 또한 ‘적’이란 형제중에서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음을 칭하는 것이며 적이란 종묘를 주관하고 왕위에 올라 조상을 잇고 후손에 전함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대통을 계승한 자를 적자로 간주하였다. 또한 그는 세자때로 말하면 소현과 효종이 존귀하기가 같겠지만 효종이 왕이 된 후로 말하면 그 존귀함은 결코 소현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효종이 서자라고 하여 해로울 것이 없다”는 송시열의 설을 용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논리는 효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즉 소현세자의 살아있는 삼남 석견을 적통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으로 서인들은 효종이 아니라 석견을 임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주장이니 이는 서인들이 역적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또한 윤선도는 예론에서 벗어난 사항을 가지고 양송을 비판하였다. 송시열에게 무엇보다 큰 위협이 된 것은 적통, 종통설 때문이었다. 즉 송시열의 기년설이 마치 인조의 적통을 소현세자에게 돌릴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이 논리를 제기했던 까닭이다. 윤선도는 이 소에서 송시열에 대한 불만을 여지없이 표출하였다. 그는 양송은 효종의 극진한 대우를 받아왔으면서 안부존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효종의안부존영은 돌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10년을 군림한 효종에게 적자의 지위를 주지 않아 중자의 예를 쓰게 하였고 기근과 역병이 돌고 백성이 유랑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등 국정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리고 송시열과 송준길은 예학의 대가라 해서 국가대례를 맡겼는데 소견이 이와 같이 잘못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라고 한탄하고 있다. 이렇게 그의 복제소에 포함된 내용은 송시열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 비판이었다. 이때까지는 그 누구도 양송의 학문과 인격, 대의명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저항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윤선도의 처사는 이례적인 일인 것이다.25

  이상에서 기해예송이 윤선도의 상소 제기에 의해 순수한 예학논쟁에서 당쟁으로 발전되어 전개됨을 알아보았다. 요컨대 윤선도의 상소는 궁극적으로 허목의 재최삼년설을 지지하고 양송의 기년설을 조목조목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선도의 복제소는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당시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던 양송을 예론에서 벗어난 사항들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리하여 당시까지 예학논쟁의 형태로 진행되던 복제논의를 당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게 되었던 것이다.

 

 2) 윤선도의 복제상소에 대한 논쟁

  윤선도의 적통, 종통론은 당시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인 석견이 살아있었고 서인들에 의하여 강빈에 대한 신원이 추진되고 있었으므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에게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주장이었다. 이에 서인들은 윤선도의 복제소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보이게 되었다. 삼사에서는 윤선도의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으며 송시열은 상소가 올라오기 전 낙향한 상태였고 송준길도 윤선도의 복제소가 올라오자 황급히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이에 서인들은 현종에게서 떠나는 송준길을 만류해야 하고 윤선도를 국문하여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현종은 처음에 윤선도는 바로 선왕의 사부였으니 차마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하여 함부로 죽일 명분이 없음을 표명한다. 그러나 서인의 성화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윤선도를 삼수에 위리안치 시켰다.26

  서인들이 문제삼은 윤선도의 죄목은 예론에 기탁해서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참람한 용어들을 제 멋대로 사용했으며 송시열, 송준길과 같은 명사를 인신 공격하여 조정을 떠나게 했다는 것이었다. 적통, 종통설같은 예론의 문제를 공박하기 보다는 오히려 서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을 문제삼은 것이다.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그렇지 않아도 삼년설에 솔깃해 있으면서 서인들의 권력에 눌려 내색하지 못하는 현종을 분발시켜 서인정권이 붕괴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서인들은 윤선도의 상소문을 조정 중신들에게 회람시켜 그 패란무도함을 주지시킨 다음 이를 불태우고 윤선도를 극형에 처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조정대신들이 허목의 삼년설에 솔깃해 있는 판국인 만큼 자칫하면 서인이 패배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상소문은 대신들에게 회람된 다음 불태워졌고, 그 자신은 삼수에 귀양가서 위리안치되었다. 그러나 귀양으로도 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성균관과 사학의 서인 유생들은 윤선도에게 더욱 엄한 국법의 적용, 즉 사형을 요청했다. 사간원의 대사간 이경억과 사간 박세모, 그리고 사헌부 정언 권격등은 합계하여 유생들 편에 가담했다. 이들은 윤선도의 상소는 예법을 논한 것이 아니라 고변서이니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실제로 조선의 법은 남을 무고하면 그 죄를 대신 받게 되어있었으니 이 경우 송시열을 역적으로 무고한 죄가 인정되면 반좌율로 그 자신이 사형당하게 되어 있었다.

  한편 윤선도가 반좌의 위기에 몰렸을때 그를 구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우윤 권시(權諰, 탄옹, 1604~1672)였다. 권시는 송시열과 사돈관계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효종을 서자라 해도 무방하다” 고 한 송시열을 비판하였다. 나아가 그는 “향간에서 시열과 준길의 잘못을 말하려고 히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마음에 그르게 여기고 속으로 비방하면서도 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면서 양송을 모두 비판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그러한 송시열의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윤선도를 “할 말을 선비”로 칭송하고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였다. 그는 먼저 윤선도를 용서하는 유시를 내릴 것을 청하여 양측을 조정하려고 하였고 현종은 좋은 뜻으로 비답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서인의 공세는 권시에게로 향해져서 모든 대간들이 권시의 파직을 청하자 현종은 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권시가 도성 밖으로 나가자 현종은 승정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였다. 이는 현종이 여론에 밀려 윤선도를 처벌하기는 했으나 은연중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27

  이러한 상황에서 기년설을 지지하던 종전의 태도를 버리고 삼년설을 주장하는 우의정 원두표의 헌의가 뒤늦게 올라왔다. 그는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허목의 삼년설을 변호하였는데 그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첫째로 장자를 위한 삼년복은 승중을 위한 것으로 장차 계승할 자에게도 삼년복을 입으니 하물며 이미 계승한 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으며, 둘째 제왕가에서는 실제로 대를 이은 계통만을 중히 여기며 셋째, 종통과 적통은 나눌 수 없으며 종통이 있는 곳에 적통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와 같이 대신들 중에서 중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으므로 왕은 예조에 하문해 유신들의 의견을 묻게 하였다. 하지만 당초 삼년설을 주장하던 윤휴, 심광수등의 인물들은 당시의 분위기에 위압되어 더 이상 적극적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유신들은 여전히 기년설을 주장하였고 실록을 상고한 결과도 일찍이 삼년복을 행한 적이 없었으므로 왕은 다수 의견에 따라 시행할 것을 명하여 마침내 기년제로 귀결되었다.28

 

 3) 예론의 법금

  기해예송에서 최대의 파란을 일으킨 윤선도의 『복제소』는 남인들의 집단적 의사 표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의 상소가 일으킨 물의는 곧 당론이라는 집단적 형태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로 인해 미증유의 정치적 위협을 느낀 서인들은 이론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윤선도를 중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이 처사를 부당하게 생각한 남인들이 여러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를 변호, 구원하고 기년설의 오류를 논변하다가 처벌되었다. 이 문제는 또한 조관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성균관 및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격론을 유발시켜 전국적인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서인정권의 처분은 단호하여 삼년설을 옹호하거나 윤선도, 조경 등을 두둔하는 관원들과 유생들은 가차없이 조정에서 추방하여 폐고시키거나 출사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  때문에 허목, 윤휴, 윤선도, 조경, 홍우원, 조수익 등의 명망이있는 남인들과 권시등 삼년설에 동조한 일부 서인이 현종대 15년간 폐고되어 벼슬에 나오지 못하였다.29

  이러한 상황에서도 서인의 기년설에 대한 반박을 담은 상소는 현종 7년인 1666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예송이 격화되자 현종은 예송 자체를 끝내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결심했다. 예론으로 해를 거듭하는 것이 결코 나라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기해년 국상때 『국조오례의』에 따라 상복을 시행했는데, 지금 와서 무슨 고칠 일이 있겠는가. 차후에 다시 예론을 논하는 상소가 있으면 비록 많은 선비들의 상소라 해도 용서하지 않고 중형으로 다스리겠다. 이 뜻을 널리 중외에 알리라” 하여 이때부터 예론은 거론할수 없는 법금(法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때 장자, 중자의 위상을 명백히 밝혀 놓지 못한 것은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조정에서 채택한 국제기년복은 송시열 등이 주장한 고례기년복과 같은 기년복이었으므로 기해예송은 서인측의 승리로 간주되었는데, 이것이 갑인예송에서 서인들이 자가당착에 빠져 패배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기해예송은 문제의 불씨를 그대로 남겨 둠으로써 또 한 차례의 예송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5. 조선사에서 예송의 의미

 1) 예학적 의미

  기해예송에서 서인이 기년설을 주장하고 남인이 삼년설을 주장한 것은 엄밀히 따지면 그들 당파의 철학적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 이었다. 남인의 사상적 종주인 이황(李滉, 퇴계, 1501~1570)의 사상은 이일원론으로서 그의 주리론에 따르면 군신, 부자, 부부, 장유의 질서가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인간관계의 질서, 즉 예였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가부장 중심의 종법질서를 합리화 하는 것이었다. 이 종법질서는 비록 왕가라 하여도 어길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황의 이런 사상에 따르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기년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효종이 비록 왕위를 이었다 하더라도 인조의 둘째 아들이라는 종법은 변할 수 없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황의 이런 사상과는 반대로 남인들은 삼년설을 주장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의 철학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정권에서 소외된 야당이기 때문이다. 즉 여당인 서인에 대한 야당의 정치공세가 삼년설인 것이다.

  반면 서인들의 사상적 종주인 이이(李珥, 율곡, 1536~1584)의 사상에 따르면 그들이야 말로 삼년설을 주장해야 했다. 이이는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도 기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상대론적 태도를 보였다. 즉 이의 절대성을 인정하지만 기의 상대성도 인정함으로써 변화의 여지를 남긴 것이고 그의 이런 이기에 대한 상대성이 현실적으로는 개혁사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런 상대성을 예론에 대입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는 삼년설이 될 수도 있었다. 비록 장자가 우위에 있다는 종법은 변할 수 없지만 이는 때에 따라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물의 상대성을 인정한다면 자의대비의 복제도 경우의 특수성을 인정해 삼년복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30

  하지만 서인들은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해 주고 싶지 않았다. 자신들이 집권당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세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는 임금 혼자가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왕가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인조반정 후 관제야당으로 출발한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이용해 야당의 지위에서 벗어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남인들은 막강한 신권에 불만을 느끼는 국왕을 자당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삼년설을 주장한 것이었다. 서인들은 왕권과 신권의 차별보다는 치자계급인 사대부의 보편성을 중시한 데 비해 남인들은 시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극대화 함으로써 왕실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이다.

  이는 또한 송시열, 송준길로 대표되는 주자예론과 윤휴, 허목, 윤선도등으로 대표되는 반주자 예론의 대립이기도 했는데, 정통 주자학이 신권 중심의 정치 운영을 통해 지주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수구, 보수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라면 반주자학은 군주권의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진보, 개혁적 견해의 표출이었다.

  예송이 발생할 무렵인 17세기는 조선사회가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던 시기였다. 양난이후 농업생산의 발달과 상업의 발달, 그리고 수공업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하여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신분제에도 차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조선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으며 기존의 사농공상으로 계서화된 조선의 신분질서로는 더 이상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사회를 유지하던 주자학은 이제 변화가 불가능한 절대적 위치에서 경우에 따라서 변화가 가능한 상대적 위치로 내려와야 했다. 사대부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해석하는 주자학은 이미 순기능을 다한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들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주자학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조선 초기에 사회변혁의 사상이었던 성리학은 인조반정 후 수구사상인 예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예학은 각 신분에 따라 지켜야 할 행동규범으로 그것에 의하면 각 신분에 맞는 행동과 예절을 지켜야 하며 사대부는 영원한 지배계급이고 농민은 영원한 피지배 계급으로 남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송논쟁은 신권중심의 정치를 통해 양반 지주와 사대부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송시열 등 서인들과 군주권 강화를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보장하려는 윤휴, 허목등 남인들의 견해가 부딪친 것이었다. 물론 남인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진보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당쟁이 격화되고 붕당이 본래의 순기능을 상실한 책임에서 남인이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남인들이 예송에서 주창한 삼년설에서 예학도 경우에 따라서는 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는 면에 대해선 분명 당시 서인들이 주창하던 예학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예송은 이처럼 예론을 이용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정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 나아가 예론을 이용한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란 측면도 지니고 있었다.

 

 2) 정치적 의미

  조선사에서 기해예송의 정치적 의미를 살펴보자면 우선 왕권과 신권의 상이한 인식의 차이에 따라 예송은 왕권강화 내지 신권강화의 정치논리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대부례는 비록 왕실일지라도 우선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서인의 입장과 제왕가의 예와 사서인의 예를 엄격히 구분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남인의 입장의 차이로 나타났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또한 양측의 정치론에도 나타나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은 사대부의 정치참여를 정당시하여 군주성학론, 세도정치론, 붕당론등을 주장한데 반해 윤휴를 비롯한 남인들은 당시의 붕당폐해를 인식하여 왕을 정점으로 한 일원적인 지배체제 구축을 위해 의정부 복구론 등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론을 통하여 서인들은 그들이 주도하고 있던 정치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기년설을 주장한 것이고 반면 남인들은 인조 이후 약화일로에 있던 왕권을 옹호하며 서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왕실의 특수성에 입각하여 삼년설을 주장한 것이다.31

  무엇보다도 조선사에서 예송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역시 정치구조의 변화에 있다. 흔히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이 견제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인조, 효종연간의 정국은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서인 내부의 대립이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인조대의 공서와 청서, 효종대의 산당과 한당이 그것이다. 남인은 인조반정 이후 소수파로 정권에 참여하였지만 항상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서인정권이 강화되어 가면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했다. 효종대에 일부 남인이 요직에 진출하긴 했지만 그 세력은 아직 미비한 수준이였다. 중요한 것은 이 당시에도 물론 붕당간의 대립은 일어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대당의 존재와 의견을 존중하는 상호비판과 견제라는 측면에서 운영되는 공존체제였다.32

  그러나 이러한 붕당간의 상호 공존적 측면은 예송을 거치면서 붕괴되는데 이전과는 달리, 상대당이 비판세력으로 공존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형세로 바뀌게 된다. 현종 15년에 기해예송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갑인예송으로 인하여 인조반정 이후 초유의 정권교체를 가져왔고 이후 50여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며 당쟁이 격화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기해예송은 조선후기 당쟁의 격화의 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6. 결론

  성리학을 이념으로 받아들인 조선은 17세기 사림들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지고 예제의 보급과 예속화가 보급되면서 예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기해예송이 발생한 것이며 이것이 조선후기 정치 및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기해예송에서는 붕당을 매개로 한 사림세력간의 갈등 양상이 표면적으로는 주자학적 명분론의 뒷받침을 받는 예론을 이념적 근거로 삼아 명분을 독점하려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의 내면상 으로는 각 정파가 제기한 예론과 그 명분은 최고정치권력의 향방과 관련된 이해관계에 기인하는 측면이 있었다. 당시 효종이 승하한 직후 최고정치권력은 왕실의 최고 어른이라는 지위를 갖는 대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의 복제와 같은 국가전례에 관하여 유권해석을 내려야 할 자의대비의 입장을 살피고 고려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즉 집권 서인 송시열은 대비의 입장을 고려하여 모자간의 의리 명분을 중시하는 기년설의 예론을 제기했던 반면, 야당인 남인 윤휴는 훗날의 정치세력의 재편을 위해 당시에는 세자인 유충한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여 군신간의 의리와 명분을 우선시 하는 삼년설의 예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갈등의 해결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살펴보면 당시 현종은 유충한 보령이었고, 서인 정국이었던 만큼 체제의 안정을 위해 집권세력의 편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서인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의 특별한 대우를 받아 국정전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고, 예학의 대가였으므로, 국가의례인 왕실의 상례에 대해 이들의 학문적, 정치적 권위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기해예송에서 현종은 서인이 제기한 기년설을 지지하게 되고 그 결과 서인이 승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기해예송은 단순한 학문적 대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또한 당시 신권과 왕권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정치구도 하에서 형식적, 이념적 최고권력자인 군왕을 매게로 한 상호 견제 심리에서 파생되어 전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전개한 예론은 단순한 왕실복제의 절차와 기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양난이후 사회, 국가질서 재건 방략을 모색하는 인식논리의 반영으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예론이 당시 정치적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예송은 17세기의 예치를 학문적인 견해차이 및 정치이념이 수반되어 나타났기에 문치주의 국가였던 조선에서는 체제논쟁적 성격을 띄었던 것이다.

  기해예송은 또한 이후 조선의 정치사에 있어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까지의 붕당은 상호공존의 측면하에 비판과 견제가 이루어졌으나 기해예송이후 상호공존의 측면은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후에는 상대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당쟁이 격화되어 정국이 혼란에 빠진 것이다. 즉 예송은 조선의 붕당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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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윤, 「17세기 예송논쟁과 서인의 집권 과정」, 상명대교육대학원, 1997

 

  

  

  

 

  

 

  

 

정원영, 「조선 후기 붕당의 명분론적 갈등에 관한 연구-기해·갑인예송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논문, 2002 , p.43

예송 연구사에 대한 검토는, 이봉규, 「예송의 철학적 분석에 대한 재검토」, 『대동문화연구』31집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96 참조

이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지두환, 「조선후기 예송연구」, 『부대사학』11집, 부산대 사학회, 1987

   정옥자, 「17세기 사상사의 재편과 예론」, 『한국문화』10집,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1989

   이영춘, 「제일차예송과 윤선도의 예론」, 『청계사학』6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89

   이성무, 「17세기의 예론과 당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등이 있다.

정원영, 앞의 논문 p.144

금지윤, 「17세기 예송논쟁과 서인의 집권 과정」,상명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7, p.7

김상희, 「17세기 예송의 정치사적 의미에 대한 재해석 -송시열과 윤휴를 중심으로」

          중앙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4, p.8

김상희, 앞의논문, p.13

김상희, 앞의 논문 pp.15-16

최병권,「우암 송시열의 행정사상 연구 -임,병 양란이후 신권중심의 국가재건론을 중심으로」,고려대 대학원,           1993, p.16

김상희, 앞의 논문, pp.17-18

김상희, 앞의 논문, p.19

김상희, 앞의 논문, p.22

홍윤선,「조선 현종대의 왕권과 신권」,연세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8, p.42

정원영, 앞의 논문, pp.44-45

정원영, 앞의 논문, pp.47-49

정원영, 앞의 논문, p.51

임현아, 「17세기 예송에서 “장자, 서자”에 관한 논의」,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6,  pp.22-24

정원영, 앞의 논문, p 54-55

정원영, 앞의 논문, pp.57-59

정원영, 앞의 논문, pp.65-68

정원영, 앞의 논문, pp.77-80

이러한 측면에 대해 홍윤선은 「조선 현종대의 왕권과 신권」에서 17세기 당시 조선의 왕권이 신권에 눌려 상당히 약했으며, 현종 역시 다른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고 하였다. 아울러 국왕의 독재정치는 지양되어야 하며 신권의 강화만이 여론정치이므로 바람직하다는 고정관념 또한 재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조선중기의 정치와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3

금지윤, 앞의 논문, p.20

정원영, 앞의 논문, pp.84-88

이성무,『조선시대 당쟁사』, 동방미디어, 2000

 

정원영, 앞의 논문, pp.96-97

정원영, 앞의 논문, pp.98-100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이성무, 앞의 책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정원영, 앞의 논문,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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